
공민왕은 1330년 5월 6일 고려 제27대 충숙왕과 명덕황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민왕은 12세에 원나라에 부임하여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공민왕이 정치적으로 중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내린 결정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공민왕은 원나라 황궁에서 노국공주와 혼인하였다. 이 중매혼을 통해 공민왕은 원나라 황실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된다.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나라 때 꿈꾸던 고려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남편과 함께 먼 나라로 간 노국공주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이는 고려 왕과 원나라 공주의 혼인 관계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깊은 문화예술적 감수성과 지식으로 잘 어울렸다.
또한 공민왕은 생전에 노국공주 외에는 다른 여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공민왕은 고려로 돌아오자마자 놀라운 본색을 드러낸다. 공민왕은 몽골식 방호복을 버리고 땋은 머리를 폐지했다.
원풍속을 보고 고려의 전통을 복원하자는 정치적 메시지였다.
원나라에서 오래 살았고 원나라 공주와 결혼까지 했기 때문에 그가 친절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하지만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에도 위기가 찾아온다. 공민왕은 즉위 후 9년 동안 후계자가 없었다.
원나라에 태어나 후손이 없었던 노국공주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 후계자를 돌봐야 했던 신하들은 노국공주를 찾아가 공민왕에게 새 아내를 맞이할 것을 청했다.
결국 공민왕은 두 후궁 사이에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오히려 공민왕과 노국공주 사이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그 후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기다리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결혼 15년 만에 선물로 온 노국공주 임신 소식이었다.
그러나 극심한 난산에 시달린 노국공주는 출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고려 부흥을 이끌 개혁 군주의 이미지는 희미해지고, 무능하고 무기력한 암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공민왕은 국고를 들여 노국공주를 추모하기 위해 거대한 무덤과 기념관을 짓고 동원되어 민심을 일으켰다.
결국 노국공주를 향한 공민왕의 그리움은 점점 이상한 행동으로 변해갔다. 노국공주가 죽은 뒤 공민왕은 ‘자제위’라는 부하 집단을 결성해 젊고 아름다운 소년들을 선발해 난잡한 행태를 즐긴 것으로 전해진다.